헤즈볼라 삐삐 폭발 전모…"이스라엘, 전면전 때 터뜨리려 했다"(종합)
기사 작성일 : 2024-09-18 22:00:59

이스라엘의 표적공습에 숨진 헤즈볼라 고위인사 파우드 슈쿠르의 집 앞에서 일인시위를 벌이는 현지인 남성


[로이터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황철환 기자 = 이스라엘과 무력 분쟁 중인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조직원들이 지닌 무선호출기(삐삐) 수천개가 동시 폭발하는 전례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레바논 보건당국은 17일(현지시간) 오후 3시30분께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선호출기가 폭발하면서 최소 12명이 숨지고 3천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다친 피해자에는 헤즈볼라 조직원 외에 모즈타바 아마니 주레바논 이란 대사 등이 포함됐고, 주변국 시리아에서도 최소 14명이 부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레바논 안보 소식통은 헤즈볼라가 수입한 무선호출기 5천개에 이스라엘 대외 정보기관 모사드가 폭발물을 심었다고 주장했다.

◇ '구시대 유물' 선택한 배경엔 이스라엘의 첨단 도·감청

작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해 가자 전쟁이 발발한 이래 하마스의 편을 들어 이스라엘 북부 국경지대를 공격해 온 헤즈볼라는 조직원들에게 무선호출기 사용을 장려해 왔다.

휴대전화가 해킹돼 공격계획이 사전에 노출되거나 이스라엘의 표적공습에 주요 인사가 암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휴대전화의 카메라와 마이크는 스파이웨어를 심을 수만 있다면 원격 도·감청 수단이 될 수 있다. 위성항법장치(GPS)를 활용해 사용자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것도 가능하다.


헤즈볼라에 무선호출기를 수출한 대만기업 골드아폴로의 제품들


[로이터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실제 이스라엘 보안기업 NSO 그룹이 개발해 세계 각국에 수출한 휴대전화 도감청용 스파이웨어 '페가수스'는 민간인 불법 사찰 등에 광범위하게 악용돼 국제적 물의를 빚은 바 있다.

그런 문제 때문에 헤즈볼라 최고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올해 2월 헤즈볼라 무장대원들에게 휴대전화를 쓰지 말라고 경고했다. 일부 외신은 헤즈볼라가 전투지역에서의 휴대전화 사용을 아예 금지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반면 무선호출기는 카메라와 마이크 등이 없어 도·감청 위험이 적고, 전파음영지역에선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도 휴대전화보다 덜한 까닭에 상당히 권장됐는데,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이를 역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 어떻게 폭발했나…헝가리 제조·유통과정에 폭발물 삽입된 듯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미국과 서방국가 당국자들을 인용, 이스라엘이 이번 사건의 배후라고 전하면서 이스라엘 측이 헤즈볼라가 수입한 무선호출기에 소량의 폭발물을 심었다고 보도했다.

헤즈볼라가 대만기업에 주문해 납품받은 무선호출기 배터리 옆에 1∼2온스(28∼56g)의 폭발물과 원격기폭장치가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무선호출기들에는 폭발 직전 신호음을 내 사용자가 호출기를 집어 들도록 만드는 프로그램도 삽입됐다고 NYT는 전했다.


무선호출기 폭발로 다친 부상자를 옮기는 레바논 구급대원들


(베이루트 로이터= 17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무선호출기가 갑자기 폭발해 다친 피해자를 병원으로 옮기는 구급대원들의 모습. 2024.9.17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소셜미디어에는 무선호출기가 별다른 전조 없이 곧장 폭발하는 모습을 담긴 영상들이 공유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공급사슬이 뚫려 제조·유통 과정에서 해당 기기들에 폭발물이 설치됐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다만 WSJ에 따르면 한 헤즈볼라 당국자는 무선호출기가 갑자기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폭발 전 이를 버린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고 전했다.

◇ 고전적 암살 수법…무차별성 탓 또다른 '묻지마식' 전쟁범죄 논란

이스라엘은 과거에도 폭발물을 심은 전화기 등을 암살 수단으로 쓰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계열 과격단체가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모사드는 프랑스 주재 PLO 대표 마흐무드 함샤리의 자택 전화기를 폭발물이 든 것으로 교체했고, 이를 모른 채 수화기를 집어든 함샤리는 중상을 입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투입돼 작전 중인 이스라엘군 전차


[AFP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1996년에는 하마스의 폭발물 전문가 야히아 아이야시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베트가 폭발물을 심은 휴대전화를 쓰다가 폭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번 사태를 두고 이스라엘의 또다른 국제법 위반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수천대의 무선호출기를 터뜨리는 건 전례가 없는 공격 방식으로 분쟁과 관계없는 민간인까지도 해칠 수 있는 무차별성이 부각된다. 실제로 이번 폭발로 어린이가 숨졌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한때 IDF 법률고문이었던 히브리대학 소속 국제법 전문가 탈 밈란은 "무선호출기 공격은 새로운 유형의 공격이고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것"이라면서 "그 공격에 누가 다칠지,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부수적 피해로 간주될지 적절히 평가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 "이스라엘, 전면전 시작 때 쓰려다 발각 위기에 터뜨려"

이번 공격의 유력한 배후로 거론되는 이스라엘이 함구하는 가운데 동기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와의 전면전을 위한 사전공작으로 무선호출기에 폭발물을 심었다가 들킬 위기에 몰리자 터뜨렸다는 뒷얘기가 미국 정부 내에서 들려온다.

미국 악시오스는 익명의 미국 정부 당국자들을 인용해 당초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무력화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전면전을 개시하는 시점에 폭탄을 터뜨릴 계획이었다고 보도했다.

미국에 본사를 둔 중동권 독립언론 알모니터가 며칠 전 헤즈볼라 조직원 일부가 무선호출기에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 이번 사건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당국자들은 발각 위험을 우려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이 들키면 못 쓰게 될 장비를 당장 써버리자고 결단해 일제 폭발이 단행됐다고 전했다.

이번 공격은 이스라엘의 소행이라면 12개월째 국경 너머에서 로켓과 미사일을 쏘아대는 헤즈볼라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일 수 있다.

특히 헤즈볼라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최고위급 지휘관이 암살된 데 대한 보복이라며 지난달 25일 이스라엘을 향해 320여발의 로켓과 자폭 드론을 날려보냈는데 이에 대한 보복이라는 관측도 있다.

일각에선 미국의 압박에도 가자전쟁 휴전을 거부해 온 네타냐후 총리가 무선호출기 폭파란 일종의 무력행사로 역내 긴장을 고조시킴으로써 또다시 휴전협상을 방해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도 나온다.

긴장이 고조될 것이라는 예상대로 헤즈볼라는 18일 오전 성명을 내고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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