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봉황동 유적서 대규모 공사 흔적…조개껍데기 섞어 흙 쌓아
기사 작성일 : 2024-10-22 10:01:16

발굴 조사 현장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예나 기자 =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약 1천600년 전 대규모 공사를 한 흔적이 발견됐다.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는 "봉황대 구릉 동쪽 경사면과 평지를 조사하던 중 대규모 토목 공사가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패각(貝殼) 성토층을 확인했다"고 22일 밝혔다.

패각 성토층은 다량의 조개껍데기를 섞어 흙을 경사지게 켜켜이 다져서 쌓은 층을 뜻한다.

이번에 확인된 성토층은 깊이가 최대 4m에 이른다.


패각성토층 남·동벽 토층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봉황대 구릉 북동쪽의 저지대를 매립해 조성했으며 인근 봉황 토성의 성벽까지 이어진다고 보면 그 길이가 100m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소는 5세기대에 이 일대에서 대지를 넓히기 위한 공사가 있었을 것으로 봤다.

경사진 땅 주변으로 흙을 켜켜이 다져 쌓아 올리는 방법은 넓은 땅을 조성할 때 주로 쓰이는데 경주 황룡사 터, 부여 금강사 터 등 삼국시대 절터에서 일부 확인된 바 있다.

봉황동 유적은 이들 유적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조개껍데기를 섞어 쓴 점에서 차이가 있다.


패각성토층 서벽 토층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구소 측은 "5세기대에 봉황대 구릉 전체를 둘러싸는 둘레 약 1.5㎞의 토축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토목 공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소는 이번 조사 성과가 향후 가야 왕성(王城·왕궁이 있는 도시)의 실체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연구소 관계자는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규모의 공사가 5세기에 이뤄졌다는 것은 당시 지배층의 권력이 공고했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3호 건물지 전경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대규모 공사를 위해서는 그만한 노동력과 재화가 필수"라면서 "이 일대가 과거 금관가야 왕성의 한 곳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연구소는 24일 오후 2시에 발굴 현장에서 설명회를 열 예정이다.

그간 유적 일대에서 발굴한 생활 토기를 비롯해 사슴·고래·상어 등 각종 동물 뼈, 의례 행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토우, 동물 뼈로 만든 화살촉 등도 함께 공개한다.


대지 조성 과정 모식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해 봉황동 유적은 1963년 회현리 패총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된 뒤, 1990년대에 진행된 봉황대 구릉 일대의 발굴 성과를 더해 확대 지정된 유적이다.

그간 발굴 조사를 거쳐 배가 드나드는 접안시설, 철을 생산하고 벼리는 작업을 하던 야철(冶鐵)터, 토성 등 청동기 시대부터 금관가야에 이르는 흔적이 확인됐다.

우리나라 남부 지방의 1∼4세기경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학계에서는 금관가야의 왕궁 또는 왕성이 있었던 터로 보고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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