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영상메시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체결 30주년을 맞아 텔레그램 채널에 올린 영상메시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공식 텔레그램 계정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2024.12.6.
임화섭 기자 = 우크라이나가 옛 소련으로부터 이어받은 핵무기를 포기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체결 30주년을 맞아 뼈저린 후회를 숨기지 않고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핵무기 포기 대가로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으로부터 문서 형태로 안전보장을 약속받았지만, 결국 '휴지조각'으로 전락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5일(현지시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체결 30주년을 맞아 공개한 영상 메시지에서 "이 문서가 제구실을 한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이런 까닭에 어떤 국가의 서명이니 안보 보증이니 약속이니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천하가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실효성 있는 보장'이 필요하다"며. '진정한 동맹과 나라 안의 현실적인 안보 토대', '스스로를 방어하고 적을 억지할 수 있는 무기',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견디도록 도와주는 단결'을 필수 요건으로 강조했다.
이에 앞서 안드리 시비하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3일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외무장관 회의에 참석하면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합의문이 담긴 올리브색 폴더를 흔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이 문서가 작성된 지 30년이 됐다"며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장기적 안보에 관해 장기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부적절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진정한 증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문서, 이 종이는 대서양 양안의 안보와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증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런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며 나토가 우크라이나의 즉각 가입을 허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는 1994년 12월 5일 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이 옛 소련으로부터 이어받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미국·영국·러시아가 이들 3개국 각각에 독립, 영토 보전, 주권, 안전을 보장한다고 다짐한 문서다.
프랑스와 중국도 이와 유사한 약속을 별도 문서로 해줬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하던 당시 러시아와 미국에 이어 핵무기 보유 규모로 세계 제3위였다.
소련 해체 당시 소련 핵무기의 3분의 1이 우크라이나 영토에 있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는 것은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실상 불가능했다. 관리와 유지에도 엄청난 비용이 계속 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로서는 핵무기를 포기하고 러시아에 넘겨주거나 해체해 버리는 것 외에 현실적 선택지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한때 핵미사일 기지였다가 현재는 박물관으로 변모한 우크라이나 중부 미콜라이우 주(州) 페르보마이스크 박물관의 학예사 올렉산드르 슈셴코의 경험담에서도 짙은 회한이 묻어난다.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슈셴코는 하르키우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한지 2년만에 옛 소련 제46로켓사단 본부가 있던 페르보마이스키의 미사일 기지로 배치됐다.
이 기지에는 핵탄두가 장착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들이 즐비한 핵미사일 격납고가 수십개 있었으나 소련 해체 이후 시설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고 있었다.
슈셴코는 여기 근무하면서 핵미사일이 옮겨지고 해체되고 격납고가 폭파되는 것을 목격했다.
슈셴코는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니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 버린 것은 실수였다는 게 내 개인 견해"라면서도 "정치적 이슈였다. 최고 지도부가 결정을 내렸고 우리는 명령을 실행했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1994년 당시 영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였던 세르히 코미사렌코는 BBC에 "우리는 순진했고 또한 (강대국들의 안전보장 약속을) 믿기도 했다"고 말했다.
코미사렌코는 1994년 당시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며 그럴 돈이 있으면 산업을 진흥하고 경제 번영을 이루는 데 써야 했다고 BBC에 설명했다.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체결 당시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 문서는 결국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무단으로 병합하고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한스크와 도네츠크에 괴뢰국을 세웠으나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당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중 어느 나라도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지금까지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