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 매립 30년] ① 글로벌 도시 인천의 주춧돌을 놓다
기사 작성일 : 2024-09-06 09:01:10

[※편집자 주 = 인천 송도국제도시가 오는 10일 매립 착공 30년을 맞습니다. 바다와 갯벌을 메워 조성된 송도는 2003년 국내 첫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첨단지식서비스 산업의 글로벌 중심도시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는 송도 매립 30년을 맞아 송도 개발의 발자취와 성과를 10년 단위로 나눠 기획기사 3편을 송고합니다.]


1994년 9월 10일 열린 인천 송도신도시 조성 기공식


[사진 임순석]

(인천= 신민재 기자 = 1994년 9월 10일.

가을을 재촉하는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인천 송도유원지 앞 한독 매립지(현 연수구 동춘동)에서 '인천 송도 앞바다 매립 신도시 기공식'이 열렸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최기선 인천시장을 비롯한 내빈들이 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발파 버튼을 누르자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행사장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훗날 단일도시 기준 세계 최대 바이오의약품 생산기지, 송도국제도시의 태동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 "대한민국 미래 성장동력 찾자"…인천시-정부 합심

'송도 해상신도시 건설 공사'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처음에는 인천시가 주도하는 신도시 개발 사업으로 출발했다.

2006년까지 바다와 갯벌 17.7㎢를 매립해 인구 25만명을 수용하고 금융·정보통신 중심의 산업도시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갯벌 위의 기적, 송도


호안 공사가 마무리된 1997년 6월 송도 매립 부지(위)와 현재 모습. [사진 임순석]

그 무렵 정부의 관심사는 '대한민국 미래 성장동력' 확보에 있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 일본의 텔레포트타운과 같은 '한국형 실리콘밸리'를 조성해 새로운 첨단산업을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이에 따라 국책사업으로 '미디어밸리'를 조성키로 한 정부는 자연스럽게 송도로 눈길을 돌렸고, 결국 서해안 지도를 바꾸는 매립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97년 송도는 미디어밸리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

경제5단체가 중심이 된 미디어밸리추진위와 인천시는 그해 6월 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2002년까지 송도신도시에 각종 기반시설을 설치하기로 했다.

이어 국내외 소프트웨어 산업과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테마파크, 영상 산업, 국립정보통신대학원을 비롯한 연구기관을 유치해 산·학·연 협동의 첨단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개발 청사진도 제시했다.


IMF에 따른 시 재정난으로 규모 축소 논란이 불거진 1998년 9월 송도 매립지 모습


[사진 임순석]

◇ IMF 한파에 위기도…송도 프로젝트 '휘청'

그러나 정부와 인천시의 이런 야심 찬 계획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라는 커다란 시련에 부딪혔다.

송도신도시 매립 첫 사업 구역인 1공구에서는 그해 11월 호안 축조를 마치고 호안 내 준설공사를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공사비 확보에 난항을 겪으며 사업은 사실상 멈춰섰다.

인천시 안팎에서는 매립 예산이 부족한 상황에서 부채를 안고 공사를 강행할 경우 시가 파산할 것이란 우려까지 제기됐다.

시는 이에 따라 1∼5공구 동시개발을 추진했던 송도신도시 사업을 공구·단계별 개발 방식으로 전환했다.

또 송도 2·4공구 개발 자금 확보를 위해 계산·청라 등 시내 미매각 택지에 대한 토지용도 제한과 매매조건을 완화하기도 했다.

송도신도시 조성 사업은 우여곡절 끝에 2000년 1∼4공구(12.67㎢) 매립까지는 마무리됐지만, 기반시설 공사를 맡은 업체의 부도로 다시 개발이 중단되는 등 가시밭길이 이어졌다.


공사가 진행 중인 2003년 10월 송도 갯벌타워 모습(왼쪽)과 현재 모습


[사진 임순석]

◇ 포기하지 않고 한걸음씩…송도, 국내 첫 경제자유구역 지정

IMF 한파에 직격탄을 맞았던 송도 프로젝트는 IMF 관리체제를 졸업한 2001년, 초기 랜드마크인 송도테크노파크 벤처빌딩(현 갯벌타워)의 착공을 계기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2004년 완공된 갯벌타워는 황량한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송도 한가운데 우뚝 자리잡으며 내일의 희망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2003년 8월에는 정부가 상하이·홍콩·싱가포르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도시들과 경쟁하기 위해 다시 한번 승부수를 띄웠다.

2001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과 수도권 최대 무역항인 인천항을 품은 인천에서 송도·영종·청라 등 3개 지역을 국내 첫 경제자유구역(FEZ· free economic zone)으로 지정한 것이다.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면 특별법에 따라 토지 공급의 유연성이 커지고 투자자에게 세금과 각종 부담금이 감면돼 개발이 한층 원활해진다.

지금은 전국에 경제자유구역이 9개까지 늘어났지만,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외국인직접투자(FDI) 실적이 국내 전체 경제자유구역 총신고액의 70%를 넘는 등 독보적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한 2003년 10월 15일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개청식


[사진 임순석]

◇ 외딴 매립지 섬이 육지와 연결…본격적인 비상 채비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계기로 송도 계획면적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17배에 달하는 53㎢ 규모로 커졌다.

아울러 2003년 11월에는 송도와 인천 육지를 잇는 첫 교량인 송도1교(현 송도국제교)가 개통하면서, 송도는 외딴 매립지 섬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토와 연결되며 비상을 꿈꾸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됐다.

송도국제도시와 인천 도심을 연결하는 교량은 현재 송도1교·송도2교(컨벤시아교)·송도3교(아트센터교)·송도4교(바이오산업교)와 아암1·2·3교를 합쳐 모두 7개까지 늘어났다.

송도와 도심을 잇는 8개 교량 가운데 마지막 미개통 교량인 송도5교는 올해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했고 2029년 준공을 목표로 건설을 준비 중이다.


2003년 11월 송도1교 개통식


[사진 임순석]

IMF 외환위기 당시 인천시 도시개발본부장을 맡아 송도 프로젝트의 최일선에서 뛰었던 오홍식(69) 전 인천교통공사 사장은 "송도 매립이 한창일 때 IMF가 터지면서 사업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오 전 사장은 "기획재정부에서 500억원을 긴급히 융통해 250억원은 외상 공사비 일부를 주고 나머지로 급한 불을 끄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천시장과 공직자들의 마음 속에는 송도 프로젝트를 꼭 성공시켜 미래산업을 유치하고 '서울의 베드타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2003년 송도


사진 상단에 갯벌타워, 하단에 송도국제어린이도서관이 보인다. [사진 임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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