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강태현 기자 = "하루 절반 이상은 산에서 보내요. 구조가 여의찮을 때는 비박도 감수해야 하고요. 끼니도 다 녹은 초코바로 때울 때가 많아요. 그래도 감사 인사 한마디면 피로가 다 녹아요."
"구조 출동. 구조 출동!"
지난달 29일 찾은 속초시 설악동 강원특별자치도소방본부 환동해특수대응단 산악구조대 사무실에 119 종합상황실 지령이 내려지자 산악구조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수십시간이 걸릴지 모를 구조 상황에 대비해 장비도 가방 안에 한 아름 챙겨 맸다.
산에서 요구조자를 업고 내려오는 산악구조대원들
[강원특별자치도소방본부 환동해특수대응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위치가 어디예요?"
다행히 상황실로부터 전달받은 요구조자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연락이 닿았다.
산세가 험한 설악산에서는 전화가 잘 터지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인 탓에 신고가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다시 연락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고 선선한 바람이 마음을 사뭇 간지럽히는 가을, 이맘때 정취를 만끽하려는 이들로 산은 그야말로 '성수기'를 맞는다.
덩달아 늘어나는 사고에 산악구조대원들의 하루도 주말, 평일 할 것 없이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다친 등산객을 들것에 옮기는 산악구조대원들
[강원특별자치도소방본부 환동해특수대응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도 소방본부에 따르면 최근 5년(2019∼2023년)간 산악사고 신고는 9천343건으로 이 중 10월에만 1천975건이 들어와 열두달 중 가장 많은 사고가 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에는 산악사고로 1천327명이 구조를 요청해 963명이 안전하게 구조됐지만, 302명은 중경상을 입고 22명은 끝내 숨을 거뒀다.
강원 지역 명산으로 꼽히는 설악산에도 이맘때면 등산 인파가 몰려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해발고도 1천708m. 한라산과 지리산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높은 이 산이 환동해특수대응단 산악구조대의 주 무대다.
이들은 속초, 인제, 양양에 걸쳐 설악산을 수호하는 산악구조 선봉장 역할을 도맡고 있다.
절벽 아래로 등산객과 내려오는 산악구조대원
[강원특별자치도소방본부 환동해특수대응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헉, 헉, 헉…"
매일 같이 오르는 산이지만, 구슬땀이 흐르고 숨이 턱 끝까지 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는 환자를 생각하면 지쳐도 발걸음은 계속 내디딜 수밖에 없다.
산행 중 길을 잃거나 일교차로 인한 저체온증, 낙상과 실족으로 인한 부상 등 사고 유형이 각양각색인 탓에 가을철 산악구조대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비수기에는 2∼3건이던 하루 출동 건수도 이맘때면 5∼6건으로 훌쩍 늘고, 건수가 많지 않아도 산에서 적게는 5시간부터 많게는 20시간까지 보낸다.
날씨가 좋지 않아 구조를 이어가기 힘든 상황에서는 텐트를 치고 산에서 밤을 새우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한 번 출근하면 기본 근무 시간은 24시간. 그러나 구조가 뜻대로 되지 않는 날에는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 귀가하는 경우도 꽤 있다.
들것에 환자를 옮겨 하산하는 산악구조대원들
[강원특별자치도소방본부 환동해특수대응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특히 비법정 탐방로는 길이 험하고 이정표도 없는 탓에 신고 당사자를 찾는 데도 난항을 겪을 때가 많다.
신고자가 다친 경우 보통 헬기 이송을 요청하지만 여건이 좋지 않을 때는 신고자를 업거나 들것으로 옮겨 산 아래까지 내려가야 한다.
길이 제대로 닦이지 않아 바위 위를 넘어 다니다 되레 구조대원이 다칠 뻔한 아찔한 상황이 빚어지기도 한다.
3년 넘게 산악구조대에 몸담은 박근형(43) 소방장은 "최근에는 인터넷에 올라온 블로그만 보고 비법정 탐방로에 몰래 들어갔다가 길을 잃거나 다치는 분들이 많다"며 "가을철에는 한 달에 3∼4건은 비법정 탐방로 관련 출동인데 한 번 가는데 최소 6시간 이상은 소요된다"고 했다.
실제 지난해 5월에는 "살려달라"며 119에 여러 차례 신고한 50대 나 홀로 등산객이 약 20시간 만에 구조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출동한 산악구조대의 막내 김슬빈(29) 소방교는 "당시 비가 많이 와 날씨가 좋지 않았던 데다 요구조자가 배터리를 아끼려고 상황실에 전화를 걸었다가 휴대전화를 꺼놓는 행위를 반복해 위치정보 시스템(GPS) 값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수색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비법정 탐방로인 탓에 땅이 고르지 않아 허리까지 차오른 빗물을 가르며 들것을 옮겼는데, 2년간의 구조대 생활 중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지난 여름에는 암벽등반을 하러 설악산에 방문한 50∼60대 등산객 12명이 고립돼 12시간여만에 절벽 70m 아래 지대로 무사히 구조되는 일도 있었다.
등산객 구조 활동하는 산악구조대원들
[강원특별자치도소방본부 환동해특수대응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일찍이 산에 오른 이들이 하나둘씩 하산하기 시작하는 정오 무렵 가슴·발목 통증, 어지럼증 등을 호소하는 등산객들이 속출했다.
산악사고는 대부분 산 중턱이나 정상 부근에서 발생한다. 올라갈 때는 체력적 여유가 있어 잘 올라가지만 하산 시에는 체력을 소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체중의 부하가 더 많이 걸리기 때문에 발목을 삐거나 구르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기도 한다.
실제 지난해 산악사고 신고 시간대를 살펴보면 오전이나 늦은 밤보다 하산 시간인 오후에 사고가 집중됐다.
식사가 한창일 오후 시간에도 구조대원들은 초콜릿, 에너지바와 이온 음료로 끼니를 때우곤 한다.
"당을 빨리 흡수할 수 있는 식품으로 들고 다녀요. 빵이나 김밥 같은 거 들고 다니라고 하는 분도 계시는데 빨리 상하기도 하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어서 비상식량으로 식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고된 구조 업무 탓에 신발 밑창이 닳아 구멍이 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온몸이 쿡쿡 쑤시는 날도 물론 적지 않다.
박 소방장은 "환자를 직접 업거나 동료들과 들것을 이용해 하산해야 해서 허리 디스크나 무릎 통증을 달고 사는 대원도 꽤 있다"며 "나와 남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산악구조대원들은 나이와 직급을 불문하고 필수적으로 자기 관리를 하고 있다.
김 소방교는 "일주일에 3회 10∼15㎞ 달리기와 헬스를 꾸준히 하고 있다"며 "산악구조대는 설악산을 중심으로 장거리 산행을 해야 하고 체력 소모가 크기 때문에 평소에 철저히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들것에 등산객을 싣고 하산하는 산악구조대원들
[강원특별자치도소방본부 환동해특수대응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고단한 업무 끝에 환자들의 감사 인사만큼이나 달콤한 보상도 없다.
산악구조대원들은 "감사 인사 받을 때가 제일 보람 있고 뿌듯하다", "무사히 구조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좋다"고 입을 모았다.
가을 정취가 무르익기 시작하면서 구조대원들은 안전 수칙 준수를 당부했다.
김 소방교는 "본인의 체력에 맞는 등산로를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등산 시간이 짧을 것으로 예상되더라도 휴대용 랜턴이나 보조배터리, 보온 의류 등 장비를 꼭 챙겨야 한다"며 "비법정 탐방로는 길을 잃거나 다치는 경우 구조가 늦어질 수 있으므로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구조 출동. 구조 출동."
땀이 채 식기도 전에 구조대원들은 또다시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