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모 기자 = 겨울에 내리는 눈은 반갑기도 하지만 귀찮기도 하다.
차도에 쌓인 눈으로 차들이 엉금엉금 갈 수밖에 없고 추돌 사고가 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보행자들도 마찬가지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신발이 젖기 일쑤고 눈길에 엉덩방아를 찧을 수도 있다.
지난달 말 수도권 폭설 사태처럼 많은 눈이 내릴 경우 스키를 타고 출근하는 황당한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이렇게 쌓인 눈은 대체 누가 치워야 하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겨울철마다 제설 대책을 세우고 눈이 올 때마다 제설작업에 나서는데 누구에게 제설 책임이 있나? 정부나 지자체 말고 일반 시민들은 자기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울 의무는 없을까?
분주한 제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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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국도는 정부, 지방도는 지자체가 제설 책임
도로 제설 작업의 책임을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법령은 없지만 통상 '도로법'에 따라 도로관리청이 담당 도로의 제설을 맡고 있다.
도로법 제3조에 "도로의 상태가 적정하게 유지되도록 할 것"을 도로관리청의 책무 중 하나로 열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로관리청은 도로에 관한 계획, 건설, 관리의 주체가 되는 기관을 말한다. 고속도로와 일반국도는 중앙정부가, 지방도는 지자체가 관리하는 식으로 도로의 종류에 따라 도로관리청이 달리 지정됐다.
단, 고속도로의 경우 한국도로공사가 중앙정부를 대행해 해당 업무를 맡고 있다.
이런 도로가 아닌 집 앞길에 쌓인 눈은 누가 치워야 하나.
'자연재해대책법' 제27조에서 책임 주체를 '건축물 관리자'로 설정했다. 건축물 관리자는 건축물의 소유자, 점유자, 관리자로서 그 건축물에 대한 관리 책임이 있는 자를 지칭한다.
쉽게 말하면 주택의 경우 집 주인이나 세입자, 아파트는 관리사무소가 건축물 관리자가 된다.
이 조항에 따르면 건축물 관리자는 건축물 주변의 보도(차도와 보도로 구분된 도로에서 보행자가 다니는 도로), 이면도로(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은 폭 12m 미만의 도로), 보행자 전용도로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한다.
구체적인 제설 책임 주체와 범위 등은 지자체 조례가 규정한다.
예컨대 '서울특별시 건축물 관리자의 제설·제빙에 관한 조례'에 따르면 제설 책임 순위는 소유자가 건축물에 거주하는 경우 소유자, 점유자 및 관리자 순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점유자, 관리자 및 소유자 순이 된다.
즉, 집주인이 자기 집에 살면 집주인이, 세입자가 살면 세입자가 제설 책임의 1순위가 된다.
건축물 관리자가 눈을 치워야 하는 범위는 보도의 경우 해당 건축물의 대지에 접한 구간이다. 말 그대로 집 주변 보도에 쌓인 눈은 집주인이나 세입자가 치워야 한다.
이면도로와 보행자도로의 경우 해당 건축물이 주거용이면 해당 건축물의 주 출입구 부분의 대지경계선으로부터 1m 구간, 비주거용이면 해당 건축물의 대지경계선으로부터 1m 구간이 제설 책임 범위가 된다.
건축물 관리자는 낮에 눈이 그쳤으면 그친 때로부터 4시간 이내에, 야간이라면 다음 날 오전 11시까지 눈을 치워야 한다. 일일 강설량이 10㎝ 이상이면 24시간 이내에 치우면 된다.
이 조례엔 처벌 조항이 없어 눈을 치우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불이익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단, 민사상 손해배상의 책임이 발생할 수 있다. 눈을 제대로 치우지 못해 발생한 사고에 대해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책임을 인정한 판례가 있다.
폭설 속 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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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서 폭설 고립 사고시 손해배상 요구할수도
중앙정부나 지자체에 제설 책임이 있는 도로에서 사고가 났을 경우는 어떻게 될까?
정부의 제설 작업 미비로 교통사고가 났다고 주장하더라도 손해배상을 받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도로와 같은 영조물(공공의 목적에 쓰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 항상 완전무결한 상태를 유지할 정도의 고도의 안전성을 갖추지 않았다고 해서 관리에 하자가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그동안 확립된 대법원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나아가 "설치·관리 주체의 재정적, 인적, 물적 제약 등을 고려해 그것을 이용하는 자의 상식적이고 질서 있는 이용 방법을 기대한 상대적인 안전성을 갖추는 것으로 족하다"는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대법원은 고속도로와 일반 도로 등 도로의 성격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기도 했다.
예컨대 2000년 4월 선고에서 "최저속도의 제한이 있는 고속도로 등 특수 목적을 가진 도로가 아닌 일반 보통의 도로까지도 도로관리자에게 완전한 인적, 물적 설비를 갖추고 제설작업을 해 도로상의 위험을 즉시 배제"하도록 하는 관리의무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도로 통행의 안전성은 그와 같은 위험에 대면해 도로를 이용하는 통행자 개개인의 책임으로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속도로의 경우는 판단이 달랐다.
2004년 3월 경부고속도로 남이분기점 부근에 하루 동안 49㎝의 폭설이 내려 정체가 시작해 하루 남짓 91.5㎞ 구간에서 차량 9천850여대, 탑승자 1만9천여명이 고립됐다.
당시 고속도로에 고립됐던 승객 중 대전·충남지역 시민들은 원고인단 244명을 구성, 그해 4월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1인당 200만원씩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고립 시간에 따라 1인당 35만∼60만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2008년 3월 확정했다.
대법원은 당시에 "최저 속도의 제한이 있는 고속도로의 경우에 있어서는 도로관리자가 도로의 구조, 기상예보 등을 고려해 사전에 충분한 인적·물적 설비를 갖춰 강설 시 신속한 제설작업을 하고 필요한 경우 제때 교통통제 조처를 함으로써 고속도로로서의 기본적인 기능을 유지하거나 신속히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관리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폭설에 꼼짝 못 하는 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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