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샷!] "큰아빠 되고 이모는 안된다"…장례휴가 차별 여전
기사 작성일 : 2025-01-18 06:00:29

경조사 봉투


[촬영 이충원]

이승연 기자 =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고모가 엄마처럼 챙겨 주셨다. 유년기 때 키워준 고모께 감사드린다."(축구선수 구자철)

"8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 이모의 손에서 자랐는데 내게는 제2의 엄마 같은 분이셨다."(가수 박봄)

"이번 수상을 통해 가장 먼저 감사드리고 싶은 분은 저를 엄마처럼 키워주신 이모할머니다."(고(故) 최진실 딸 최준희)

"어렸을 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키워주셨다."(배우 윤시윤)

모두 알만한 유명인들의 발언이다.

과거 같으면 쉬쉬했을 수 있는 개인사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제는 유명인도 자연스럽게 공개하면서 사람마다 가족관계가 다양할 수 있음을 새삼 환기하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을 장례 문화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취재 결과, 부계 혈통주의·전통적 가족의 모습에 묶인 장례 휴가 차별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대기업에 다니는 10년 차 직장인 A씨는 얼마 전 고모상을 당했지만, 회사로부터 경조사비 및 휴가를 받지 못했다.

지난해 같은 팀 동료가 큰아버지상을 당했을 때 3일의 휴가 및 일정액의 경조사비를 받은 것과 상반된 것이다.

A씨가 회사 내규를 살펴보니 백숙부(부친의 남자형제)상에 대한 휴가 및 경조사비 규정은 있지만, 부친의 여형제(고모)·모친의 형제(이모·외삼촌)에 대해서는 규정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A씨는 "2025년에 이런 성차별이 버젓이 회사 내규에 적혀있다는 게 충격적"이라며 "주변에 물어보니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대기업 대다수가 유사한 내규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호주제 폐지 (CG)


[TV 제공]

지난해 매출액 상위 10대 민간 기업의 장례 휴가 규정을 살펴본 결과, 이 중 7개 기업은 고모·이모·외삼촌상에 대한 장례 휴가를 지급하지 않고 있었다. 반면 백숙부상에 대해서는 평균 2∼3일의 휴가를 지급했다.

10대 기업은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으로 집계한 결과를 토대로 했다.

10대 기업 중 1개사는 백숙부·고모·이모·외삼촌상에 대해 모두 휴가를 지급하지 않았고, 2개사는 이들에 대해 모두 동일한(1∼2일) 휴가를 지급하고 있었다.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에도 백숙부·고모·이모·외삼촌상에 대해서는 모두 휴가가 지급되지 않는 식으로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는 "그간 인권위가 내린 판단에 기반했을 때 이 사안도 '차별'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2013년 인권위는 기업들이 친조부모상과 외조부모상에 대해 경조휴가 및 경조비 지급 차등을 두는 관행을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당시 기업들은 인권위에 "외조부모상을 당한 직원은 외손이라 친손과 달리 직접 상주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차이를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권위는 "성별과 관계 없이 1∼2명의 자녀만 출산하는 등 가족 구성의 변화로 부계 혈통의 남성 중심으로 가정의례를 치르지 못하는 가족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러한 차별 관행은 문제가 있다고 봤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이미 부계 혈통 중심의 호주제가 폐지된 지 8년이 지났고, 우리 헌법은 혼인과 가족생활에서 남녀의 성을 근거로 차별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다"고 했다.


성 평등 (PG)


[장현경 제작] 일러스트

인권위가 입장을 표명한 지 약 12년이 지난 현재 외조부모·친조부모상에 대한 장례휴가 차별 관행은 일부 개선된 상태다.

현재 10대 기업은 모두 외조부모·친조부모상에 대해 동일한 휴가일수를 지급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규모가 작은 기업은 여전히 외조부모·친조부모에 차별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인권위는 친조부모 사망에 대해서만 경조휴가·경조비를 지급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진정을 접수해 이듬해 차별 행위라고 판단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성차별적 관행을 개선하는 동시에 변화하는 가족관을 반영해 내규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명백한 차별적 관행"이라며 "기업의 지속 가능성, 가족 형태의 다양성을 고려해 일정 일수의 가족상을 정해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자신과 친밀한 가족의 죽음을 챙길 수 있도록 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고 밝혔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도 "핵가족화되는 추세에 과거의 노사 협약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남은 규정으로 보이지만, 무작정 휴가를 확대한다고 실효성이 있진 않다"며 "개인마다 다양하고 특수한 가족 관계를 가진 만큼 노사가 협의해 일정 일수의 경조휴가를 선택·활용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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