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48세 푸틴의 독일의회 연설
기사 작성일 : 2025-02-13 09:01:01

독일 의회에서 연설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2001년)


[ⓒDeutscher Bundestag/Achim Melde. 재판매 및 DB 금지]

(베를린= 김계연 특파원 = 2001년 9월25일, 집권 2년 차였던 48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 연방의회 단상에 섰다. 그는 "용기를 내어 괴테와 실러, 칸트의 언어 독일어로 연설하겠다"며 20분 넘게 '유럽 통합'을 이야기했다.

푸틴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교육 지출이 국방 지출을 넘었다"며 "우리는 냉전이 끝났음을 확실하고 단호하게 선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민주사회와 시장경제를 구축하는 시작 단계"라며 러시아의 인력과 천연자원, 경제·문화·국방 분야 잠재력을 유럽의 역량과 결합하자고 제안했다.

독일 의원들은 푸틴이 연설을 마치고 본회의장을 떠날 때까지 기립해 손뼉을 쳤다. 이 중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사회민주당·SPD), 나중에 16년간 총리를 지낸 앙겔라 메르켈 당시 기독민주당(CDU) 대표, 이달 총선에서 총리 자리를 노리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현 CDU 대표도 있었다. 푸틴의 유창한 독일어가 통일 직전까지 동독 드레스덴에서 소련 정보기관 KGB(국가보안위원회) 요원으로 근무한 덕분이라는 점은 문제되지 않았다.

푸틴의 세일즈 외교에 독일과 러시아가 수십 년간 이어온 '에너지 밀월'이 더욱 깊어졌다. 독일은 미국의 강력한 견제에도 두 나라를 직통으로 연결하는 발트해 해저 가스관 노르트스트림 건설을 밀어붙였다. 슈뢰더 전 총리는 퇴임 이후 러시아 에너지기업 로비스트로 변신했다. 막대한 통일비용 부담에 '유럽의 병자' 소리를 듣던 독일 경제는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로 일어섰다. 20여 년 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노르트스트림이 폭파되면서 다시 '유럽의 병자'로 전락할 위기에 내몰렸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왼쪽) 앞에 개 풀어놓은 푸틴 대통령(2007년)


[AP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독일에서는 러시아 에너지에 경제를 인질로 잡히고 결과적으로 전쟁비용까지 대줬다는 비판과 반성이 나왔다. 지금은 발트해 주변 이웃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뒤섞여 있다. 안보 전문가들은 한동안 경쟁하듯 '러시아가 몇년 안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을 침공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해저 전력선이 끊어지거나 수상한 드론이 나타나면 일단 러시아의 공작을 의심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선언하고 군비 증강에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독일 공군참모총장의 대화를 도청해 언론에 공개하는 러시아의 공작과 심리전에 맥없이 무너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힘을 빼려고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 세력이 오래 기획한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서방에서 소수의견에 그친다. 유럽에서 러시아산 에너지의 빈자리를 미국이 채우고 있는 건 숫자로 입증되는 사실이다. 자국민 피 한방울 안 흘리고 사실상 대리전을 치러온 미국은 이제 그동안 군사지원의 대가로 우크라이나에 희토류를 내놓으라고 한다. 유럽이라고 밑지는 장사를 할 리 없다. 14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독일 뮌헨안보회의에서 서방 각국의 주판알 튕기기가 본격 시작되는 모양이다. 3년간 죽어나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람들 목숨값은 누가, 어떻게 계산하는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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