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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모인 유럽 지도자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엑스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파리·브뤼셀= 송진원 정빛나 특파원 =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둘러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독단 행보에 맞서 유럽의 주요국 지도자들이 1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 긴급히 모였다.
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스페인·네덜란드·덴마크·폴란드 정상과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은 이날 오후 프랑스 대통령실인 엘리제궁에서 3시간 반가량 비공식 회동을 했다.
이날 회동은 전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전격 성사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서양 동맹' 관계를 무시한 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 나서기로 하자 화급히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비공식 회동이었던 만큼 이 자리에서 특정 이슈에 관한 의사결정이 이뤄지진 않았다. 참석자들이 공동 서명한 선언문이 발표되지도 않았다.
참석자들은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변함없는 지원 의사와 현재 미국과 러시아 주도로 진행되는 종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가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강하게 동의했다. 우크라이나를 앞세우긴 했으나 사실상 유럽 땅에서 벌어지는 일과 관련해 유럽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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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독 정상 인사
(파리 로이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엘리제궁에 도착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맞이하고 있다. 2025.02.17.
자국 선거운동 문제로 가장 먼저 회의장에서 나온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기자들에게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할 것"이라며 "평화 협정에 대한 논의는 환영하지만, 우크라이나에 강요된 평화는 거부한다"며 우크라이나가 평화 협상의 당사자로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도 "우크라이나 없이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결정은 없고, 유럽 없이는 유럽에 대한 결정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고,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도 "우크라이나의 평화와 유럽 안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며 종전 협상에 우크라이나와 EU가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도 엑스(X·옛 트위터)에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힘을 통한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확인했다"며 "우크라이나의 독립, 주권, 영토 보전을 존중하고 강력한 안보가 보장되는 평화"라고 적었다.
성급한 종전 협상이 자칫 유럽에 더 큰 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메테 프리데릭센 덴마크 총리는 "불행히도 러시아는 지금 유럽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며 "너무 빠른 휴전은 러시아에 전열 재정비 후 우크라이나나 유럽 다른 나라를 공격할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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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서 유럽 주요 지도자들 긴급 회동
(파리 AFP=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엘리제궁에 도착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을 맞이하고 있다. 2025.02.17.
참석자들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그 필요성이 더욱 커진 유럽 자강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논의했다.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에 있어 유럽이 더 큰 역할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국방비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투스크 총리는 "우리는 대서양 횡단 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며 "유럽 파트너들은 더 큰 유럽 방어 역량을 위한 시기가 왔음을 깨닫고 지출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도 "유럽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의 전액을 부담해야 하고 동시에 유럽에서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적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역시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미래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실존적 질문"을 맞닥뜨리고 있다면서 "우리는 과거의 안락함에 절망적으로 집착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새 시대를 인식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안보와 대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그럼에도 나토 틀 내에서 수십 년간이어져 온 미국과의 안보 협력은 앞으로도 긴밀히 이어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스타머 총리는 우크라이나에 제공되는 모든 보장에는 "미국이 안전장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러시아를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고, 투스크 총리 역시 "유럽과 미국은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숄츠 총리도 "유럽과 미국 사이에 안보와 책임의 분담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나토는 우리가 함께 행동하고 위험을 공유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보장한다는 점에 기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마크롱 대통령도 이날 회동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 약 20분간 통화했다고 엘리제궁은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독주 때문에 머리를 맞댄 자리긴 하지만, 그에게 직접 상황 설명을 해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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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도착한 영국 총리
(파리 로이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엘리제궁에 도착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를 맞이하고 있다. 2025.02.17.
이날 회의 테이블에 종전 협상 후 유럽군을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하는 안이 올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회의 후 참석자들 간 반응이 확연히 갈리며 파병론을 둘러싼 국가 간 갈등을 드러냈다.
그간 파병론에 부정적 입장을 보여 온 숄츠 총리는 관련 질의에 "좀 짜증이 난다"며 아직 전쟁 중이며 평화 회담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파병 이야기를 하는 건 "매우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투스크 총리도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위해 폴란드는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 나설 것이지만 폴란드 군대를 파견하는 건 상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반면 전날 언론 기고문을 통해 영국군 파병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스타머 총리는 관련 논의가 "초기 단계"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지속적인 평화 협정이 체결된다면 다른 국가들과 함께 영국군을 현지에 투입하는 걸 고려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도 지난해 초부터 유럽군 파병 가능성을 언급하며 적극적인 입장이다.
EU 회원국 중 이날 파리 회동을 비판하는 진영도 있다.
친트럼프·친푸틴 성향인 헝가리의 씨야르토 페테르 외무장관은 "오늘 파리에서 친전쟁, 반트럼프, 불만에 가득 찬 유럽 지도자들이 모여 우크라이나의 평화 협정을 막으려 한다"며 "우리는 트럼프의 야망을, 미국과 러시아의 협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고 AFP 통신이 전했다.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도 이날 파리 회의에 EU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한 것을 비판하며 특히 유럽군 파견 문제는 "EU가 관여할 수 없는 주제"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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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간 전화통화 기사 다룬 러시아 매체들
[로이터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