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원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가결을 계기로 '1987년 체제'의 한계론이 제기되는 가운데, 정치·법조계 전문가들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하는 방향의 헌법 개정을 제안했다.
니어재단(이사장 정덕구) 주최로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9일 열린 '개헌 세미나'에서는 현행 '5년 단임제' 근간의 대통령제 문제점을 중심으로 향후 개헌의 방향과 방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오갔다.
헌법재판관 선출안 국회 본회의 통과
김주형 기자 =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마은혁, 정계선, 조한창 헌법재판소 재판관 선출안이 야당 주도로 통과되고 있다. 국민의힘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에게 임명 권한이 없다는 점을 들어 표결에 불참했다. 2024.12.26
◇ "제왕적 대통령제로 삼권분립 무너져…승자독식 문제 해결해야"
전문가들은 현행 대통령제가 제왕적 속성을 갖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권력구조 중심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통령의 권력이 사실상 삼권분립을 넘어서고 있다"며 "대통령의 권력이 정부 내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입법부인 국회와 사법부인 법원, 헌법재판소에도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장 교수는 "대통령의 국회에 대한 영향력은 여당 국회의원 선거의 공천, 총리·장관 등 임명권을 통해 나타난다"며 "사법부에 대한 영향력은 수뇌부에 대한 임명권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대통령제에 의한 승자독식이 적절하게 제어되지 않고 있다"며 "그로 인해 정부와 여당은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하고, 야당은 정부·여당의 실패를 통해 차기 정권을 잡으려 정부 정책의 발목잡기에 여념이 없다"고 비판했다.
우윤근 전 의원도 "제왕적 대통령제는 민주주의에서 '선출된 군주'로 군림하며, 현실 정치에서 승자독식 구조와 맞물려 제도적으로 보장된 권한 이상의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속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우 전 의원은 "국회는 내내 제왕적 대통령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터의 베이스캠프가 되고, 대통령이 선출된 이후에는 대통령 권력을 대변하는 세력과 대통령 권력을 차지하려는 세력 간에 중단 없는 대회전의 장이 된다"며 "승자독식 구조에서는 대통령이 필연적으로 법적 권한 이상을 휘두르게 돼 있다"고 짚었다.
기자회견 하는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장
박동주 기자 =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장이 '선개헌 후대선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12.24
◇ "대통령·총리가 선의의 경쟁하도록 개편"…국민 호응 가능성엔 우려도
현행 대통령제에 대한 대안으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절충하는 형태의 '이원정부제'(분권형 대통령제)가 공통으로 거론됐다.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하고, 국회가 선출한 총리가 정부를 운영하는 방안이다.
장영수 교수는 "정부 내에서의 분권을 통해 승자독식을 막고, 대통령과 총리가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진영 갈등이 극단화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적합한 정부형태"라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분권은 대통령제의 승자독식을 극복하고 발목잡기 경쟁이 아닌 선의의 경쟁이 가능한 구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특히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야당은 정부의 실패를 통해 집권하려는 경향 때문에 발목잡기에 진심이 경우가 많다"며 "국가 전체를 위해서는 이러한 소모적 경쟁보다는 대통령과 총리 중의 누가 맡은바 국정운영을 더 잘하는지에 대한 선의의 경쟁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윤근 전 의원도 "극단적 정쟁만을 유발하는 5년 단임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하루속히 폐지하고 제왕적 대통령 권한을 국회와 분산하는 분권형 개헌 또는 내각제 개헌이야말로 우리 정치 개혁의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국회 권한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국민적 동의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 전망도 나왔다. 국회에 대한 국민 신뢰가 낮다는 점에서다.
장용근 홍익대 법학과 교수는 국회가 총리 선출권을 가지는 점 등에 대해 "국회에 대한 국민 신뢰가 가장 낮은 현실에서 국회 권한 강화를 위한 안은 국민투표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先 개헌·後 대선'에는 신중…"긴급·공감대 있는 사안부터 처리"
전문가들은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는 '선(先)개헌 후(後) 대선'론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 우선순위에 따른 '순차적 개헌론'을 제안했다.
장영수 교수는 "개헌이 우선인지, 대선이 우선인지를 논하는 것은 현재로서 적절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개헌논의 및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개헌에 대한 여야의 합의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예상하기 어렵고, 언제 대선이 치러질 것인지도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현재로서 개헌은 개헌대로 준비하면서 여타의 정치 상황 변화를 예의 주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개헌 사항들을 일거에 처리하려고 욕심부려서는 안 되고, 긴급하고 국민적 공감대가 뚜렷하며 여야 합의에 큰 무리가 없는 사항을 우선 처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용근 교수는 "(개헌 마지막 절차인) 국민투표는 단일안에 대한 가부를 묻는 것이기 때문에, 개헌은 반드시 원포인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지금의 헌법 개정논의는 정부형태 중심의 통치구조 중심 논의에 한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고 주장했다.
한편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통치구조 개혁과 함께 선거제도 개정 역시 매우 중요하다"며 "다당제가 가능한 형태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