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시크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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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숙희 기자 =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중국의 '저비용 고성능' AI 모델인 딥시크(DeepSeek, 深度求索)의 등장 속에 중국 남동부의 한 도시가 주목받고 있다.
바로 딥시크의 창업자인 량원펑(梁文鋒)을 배출한 공학 명문 저장대학교가 있는 항저우(杭州)시다.
AI와 로봇 관련 스타트업의 발전 속도만큼은 미국을 앞지른다는 평가가 나오는 항저우시는 '1세대 테크 산업'의 본산으로 불린 선전의 뒤를 이어 중국의 과학기술 혁신을 이끌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량원펑처럼 해외 유학파 출신이 아닌 토종 인재들이 항저우를 기반으로 잇달아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항저우발 AI 돌풍'은 'AI 굴기'를 내세운 중국 정부의 과학 인재 육성 정책의 성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유니트리의 휴머노이드 로봇 공연
[중국 상관신문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 선전 잇는 '2세대 테크' 본산?…'항저우 6룡'에 관심
지난해 연말 중국 테크 업계에서 '항저우 류샤오룽(六小龍·육소룡)'이라는 신조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항저우에 있는 6마리의 작은 용'이라는 의미로, 딥시크를 포함한 항저우 기반의 6대 신생 테크기업을 가리키는 이 말은 곧 업계 바깥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딥시크가 지난달 20일 최신 모델을 공개하며 AI 선두주자인 엔비디아 등에 충격을 안기기 이전 이미 AI와 로봇 분야에서 항저우발 지각변동은 어느 정도 예고됐던 셈이다.
이들 6룡의 공통 분모 중 하나는 '저비용' 혹은 '저가' 전략이다.
중국에서는 딥시크를 'AI계의 핀둬둬'라고 부른다고 한다. 핀둬둬는 전자상거래 플랫폼인 테무의 모회사이자 중국 내에서 주로 최저가 공동구매에 이용되는 앱 명칭이다.
젊은 인재들이 대규모 인력이나 고사양·고비용 투자를 하지 않고 창의성을 무기로 이른바 '가성비' 승부를 보고 있는 것이다.
딥시크를 제외하면 6룡에서는 로봇업체인 유니트리(U, 宇樹科技)와 딥로보틱스(DEEP Robotics, 雲深處科技)가 단연 눈에 띈다.
유니트리는 올해 춘제(春節·중국의 설) 갈라쇼에서 군무를 추는 휴머노이드 로봇 'H1'을 공개해 대중에게 이름을 각인시켰다.
싱가포르의 전력터널 순찰에 투입된 딥로보틱스의 산업용 4족 로봇 'X30'은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나서서 기술력을 극찬하기도 했다.
지난해 콘솔게임 '검은신화:오공'으로 흥행 대박을 터뜨린 게임사이언스(Game Science, 遊戲科學)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분야의 브레인코(BraionCO, 強腦科技), 3D프린팅 업체인 매니코어(MANYCORE, 群核科技) 등이 6룡의 나머지 자리를 차지했다.
유니트리의 창업자 왕싱싱(王興興)은 자사 로봇들의 성공적 갈라쇼 데뷔 직후 중국판 인스타그램인 샤오훙수(小紅書·Rednote)에 로봇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려 인기를 증명하기도 했다.
그의 게시물에는 중국 네티즌들이 '노인 돌봄 로봇을 만들어달라', '청소·요리 로봇이 필요하다'는 등 의견을 쏟아내며 전폭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유니트리 창업자 왕싱싱과 춘제 갈라쇼에서 춤춘 로봇
[왕싱싱 샤오훙수 캡처. 재판매 및 DB금지]
◇ 저장대·저장과학기술대 등서 '中 토종 인재' 탄생
딥시크를 만든 1985년생 량원펑과 1990년생 왕싱싱은 젊은 인재라는 것 말고도 항저우시에서 대학교를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량원펑은 저장대 전자정보공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왕싱싱은 저장과학기술대 전기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딥로보틱스의 창업자인 주추궈(朱秋國)는 저장대 제어과학·공학학원 부교수로 재임 중이기도 하다.
중국 현지 매체인 저장일보는 "이공계 남자 인재들의 선택을 받은 항저우가 뜬다"면서 "항저우의 6룡은 이제 국제적으로 '동방의 신비한 힘'으로 불리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이 졸업 후 친숙한 지역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는 선택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배경이 있는 것은 아닌지 관심이 쏠린다.
중국의 '1세대 테크'라고 분류할 만한 화웨이, BYD, 텐센트 등이 중국 남부 도시 선전에서 기틀을 닦았다면, 저장대·저장과기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2세대 테크'에 속할 많은 스타트업들이 항저우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상하이에 인접한 저장(浙江)성의 성도인 항저우는 인구 약 1천250만명의 중국 동부 중심 도시다.
항저우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플랫폼인 알리바바의 탄생을 필두로 중국에서 '인터넷의 수도'로 발돋움했다. 항저우 출신인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은 항저우사범대를 졸업한 뒤 영어교사로 일하다 알리바바를 창업했다.
항저우는 이를 기회로 삼아 AI와 로봇 분야 등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야오가오웬 항저우 시장은 지난달 중순 중국중앙TV(CCTV)와의 인터뷰에서 "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과학기술 투자만큼은 절대 줄일 수 없다"면서 "혁신이야말로 항저우의 도시 정체성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항저우는 최근 '항저우시 AI 산업 체인 고품질 발전 행동 계획(2024~2026년)'을 발표하고 미래 청사진을 공개했다.
계획에 따르면 2027년까지 항저우시 소재 AI 관련 기업의 수는 3천개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게임사이언스의 콘솔게임 '검은 신화: 오공'
[EAP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中선 '고임금' 공대 선호…'의대 쏠림' 韓과 달라
항저우에서 'AI 돌풍'을 만들어낸 량원펑의 '토종 성공신화'에 중국은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그가 해외 유학파도 아니고 베이징대나 칭화대 등 일류대도 아닌 베이징 바깥의 공대 출신이라는 점을 두고 중국이 '반도체 굴기'와 'AI 굴기' 등을 통해 국가 차원에서 과학 인재를 육성해온 것의 성과가 이제야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딥시크 돌풍의 주역 대부분이 중국 국내 대학 이공계 출신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러한 분석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샤오미 창업자 레이쥔으로부터 '연봉 20억원'의 영입 제안을 받은 사실로 명성을 얻은 '95년생 AI천재 소녀' 뤄푸리(羅福莉)는 베이징사범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딥시크 AI 모델의 추론 효율을 높인 학습 아키텍처 멀티헤드잠재어텐션(MLA) 연구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가오화쭤(高華佐)는 베이징대에서 물리학 학위를 받았다.
중국의 이과형 인재들이 공대로 몰리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취업이 다른 전공에 비해 잘되고 고임금을 받기 때문이다. 중국은 국가 주도로 전기차나 AI 같은 신산업의 부흥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중국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청년 실업률 상승은 공대 선호 현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지난해 말 중국에서 온라인을 통해 공개된 '취업률 상위 50위 전공'을 보면 절반 이상을 공학 계열 전공이 차지했다.
실제 대학입학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은 중국 수험생들은 오랜 학업 기간과 인턴 과정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의대보다 전도유망한 공대를 선호하기도 한다.
이과 인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심각해진 한국과는 대조되는 점이다.
미국의 잇단 제재에 중국 정부는 '기술 자립'을 강조하며 전공 구조를 변경하고 인재 양성 계획을 조정할 것을 대학 측에 요구하고 있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중국 전역의 대학에서 공학 전공이 7천566개 늘어났고, 로봇공학·AI·빅데이터 등을 포함한 96개의 새로운 학문 분야가 추가됐다고 지난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보도했다.
항저우의 딥시크 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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