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쿠바 한국대사관이 입주한 건물 외벽에 걸린 태극기
[촬영 이재림 특파원]
(아바나= 이재림 특파원 = 1905년 인천에서 배를 타고 멕시코로 넘어와 척박한 에네켄('애니깽') 농장에서 험한 일을 해야 했던 한인들이 새로운 희망을 찾아 쿠바로 재이주한 건 1921년의 일이다.
300여명으로 추정되는 쿠바 한인 1세대는 옥빛 카리브해와 현재 명칭 개칭 논란에 휘말린 멕시코만 방향 바다를 건넜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조국에 보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편으론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현지에서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지난해 2월 14일 쿠바와 전격적인 수교 이후 11개월 만에 아바나에 문을 연 주쿠바 한국대사관은 104년 전 한인들의 이주 경로로 알려진 바닷가 주변 '미라마르(Miramar) 비즈니스 센터'에 자리하고 있다.
스페인어로 '바다가 보이는 곳'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미라마르 건물 외벽에는 '대한민국 대사관' 현판이 대로 쪽으로 붙어 있다.
현판 위쪽에는 태극기가 달려 바람 방향을 따라 펄럭이고 있다.
깃대를 건물 2층 높이 정도에 설치해 둬서, 비교적 멀리에서부터 국기를 식별할 수 있었다.

주쿠바 한국대사관 내부
[촬영 이재림 특파원]
수교 1주년을 앞둔 13일(현지시간) 한국 언론 중 처음으로 찾아가 본 주쿠바 한국대사관에는 이호열(54) 초대 쿠바 대사를 비롯한 직원들이 근무 중이었다.
사증이나 공증, 임시 여권 발급 등 모든 형태의 영사 서비스는 이미 안정화돼 있었다.
업무차 대사관을 방문하는 교민이나 한인 후손 등을 맞이할 공간에는 태극기와 함께 한국적 이미지를 담은 사진 이미지도 걸렸다.
이호열 대사는 "걸음마 단계인 양국 정식 외교 관계를 고려할 때 대사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며 "쿠바와의 수교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추진했던 중요한 외교적 과제였던 만큼, 우호선린 관계가 처음부터 올바르게 구축될 수 있도록 최일선에서 최고의 직원들과 함께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쿠바에 재외공관을 마련하는 과정은 사실 쉽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기간 서로 결이 다른 정치 체제하에서 제 규정과 규범을 쌓아 올린 데다 긴밀한 소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축적량이 절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쿠바 아바나 도심의 행인
[촬영 이재림 특파원]
지난해의 경우엔 현지 전력 상황이 녹록지 않아, 현지 당국과의 연락이 몇 시간 지연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공관 개설 요원들은 이런 이유로 정전 같은 돌발상황을 '상수'로 여기면서 업무 계획을 여러 갈래로 짜는 등 노하우를 쌓아 나갔다고 회상했다.
이호열 대사는 "20년 전부터 현지에서 활동하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와 여러 교민의 조언과 도움이 없었다면 더 더뎌졌을 것"이라며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30여명으로 이뤄진 쿠바 한인사회는 반색하고 있다.
대사관 개관 전에는 쿠바를 관할지로 뒀던 주멕시코 대사관을 통해 공증 등 업무를 진행했는데, 이제는 일부러 멕시코를 찾아가거나 서류를 주고받는 번거로움을 덜었기 때문이다.

주쿠바 대한민국 대사관 현판
[촬영 이재림 특파원]
한국인 쿠바 영주권자 1호 주민인 정호현 한글학교장은 "한국과 쿠바가 미수교국이던 당시엔 출생신고의 경우 일본 주재 쿠바대사관을 통해 쿠바에 서류를 보내는 방식으로 처리했다"며, 수교와 대사관 개관에 따른 행정 처리 간소화를 반기기도 했다.
쿠바와의 미수교 시절 재외국민·관광객 사건·사고 대응 관련 업무를 도우며 한국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던 문윤미 영사협력원(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은 "여권 분실 사고가 종종 있는데, 쿠바 경찰서에 여권 분실 신고 이후 멕시코 대사관을 통해 여권을 받기까지 1개월이 걸린 적 있다"며 신속한 영사조력이 가능해 진 점은 대단히 큰 변화"라고 강조했다.
한인 후손들도 모국과의 원활한 소통에 대한 기대감을 표하고 있다.
실제 최근 한 한인 후손 가정은 한국에 가 있는 가족을 위해 10장 가까운 서류 작업을 진행해야 했는데, 대사관 도움으로 1시간 30여분 만에 업무를 마쳤다.
이는 대사관이 없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처리 속도"라고 한다.
정훈 쿠바한인회장 역시 "그간 교민 사회가 전무한 수준에서 어느 정도 성장했고, 팬데믹 등 비상 상황을 거치며 교민 간 단합 필요성이 제기된 바 있다"며 "한인후손회와의 고리 역할을 할 단체도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대사관 개관을 계기로 한인회 창립이 물살을 타는 등 연대를 위한 구심점이 생겼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