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우체부가 준비한 편지
[송다빈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 김상연 기자 = "내가 보낸 손 편지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한 줄기 햇살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인천 남동구에 사는 차현정(31)씨는 2021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취업 준비를 할 때 '온기 우편함'을 처음 접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구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타인과 교류가 적어지고 소외감이 들던 시기였다.
어딘가에 속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온기 우편함을 관리하는 온기 우체부에 지원했고 며칠 뒤 합격 소식을 들었다.
온기 우체부의 업무는 비교적 간단했다. 누군가 고민거리를 적어 지정된 우편함에 넣으면 1∼2주 안에 손 편지를 써서 답장을 보냈다.
비슷한 시기 인천 서구에 직장을 둔 김현정(49)씨와 연수구에 사는 송다빈(25)씨도 우연한 계기로 온기 우체부 활동을 시작했다.
우편함에는 진학과 취업, 연애와 결혼 등 일상적인 고민과 함께 가족의 투병 생활처럼 주변에 털어놓기 힘든 사연들이 다양하게 담겼다.
김씨는 "형이 맨날 괴롭힌다며 삐뚤빼뚤하게 적은 어린아이의 고민부터 노년에 접어든 어르신이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까지 여러 모습을 접했다"고 설명했다.
활동 초기에는 저마다 근심과 걱정이 담긴 편지들에 위로 한마디 얹는 일이 생각보다 순탄치 않았다.
대부분 익명의 글을 보냈기 때문에 오직 편지에 담긴 이야기나 필체에 의존해 상대방의 처지와 심정을 읽어내야 했다.
차씨의 경우 답장을 받아 읽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편안한 감정을 느끼길 바라며 정성을 담아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일례로 누군가에게 피하고 싶은 현실이 닥쳤을 때 "도망치려고 결심한 마음과 용기는 여전히 당신에게 있다. 그 힘으로 다시 걸어가면 된다"며 위로를 건네는 식이다.
그는 "최소 10번 이상 편지를 읽으면서 전체적인 답장의 방향성을 잡는다"며 "고민을 다 아는 것처럼 판단하거나 해결 방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송씨도 "마음속 깊은 고민을 털어놓는 일이기에 힘든 상황과 감정들에 함께 공감하고 있다는 점을 편지에 최대한 녹여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온기 우체부가 준비한 편지
[송다빈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답장을 보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위로의 언어'는 익숙해졌고 소중한 추억들도 함께 쌓였다.
'행복하고 싶어요'라는 큼직한 글자에 담긴 간절함에 덜컥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진학 고민을 하던 고3 수험생이 편지를 받고 힘을 얻어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기뻐하기도 했다.
세 사람은 3년 넘게 온기 우체부로 활동하며 여전히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있다. 이들은 손 편지를 쓰면서 제일 위로받는 사람은 결국 본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씨는 "남을 위로하는 동시에 스스로 위로받고 있다는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며 "더 나은 온기 우체부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표현했다.
차씨는 "혼자가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과 함께 온기 편지를 쓰고 전달한다고 생각하면 인류애가 넘친다"며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연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들에게 온기 우체부 활동은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과 같다. 스스로 떳떳해야 위로의 진정성이 완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내 삶이 올바르게 나아간다면 내 말과 마음에도 깊은 울림이 담길 것"이라며 "맡은 역할을 꾸준하게 해내는 것이 목표"라고 다짐했다.
송씨 역시 "나이가 들수록 배우는 것이 많아지고 삶의 경험도 늘면서 내면적인 성장을 하다 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분에게 좋은 편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씨는 "풍성한 내용으로 편지를 쓰려면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청년 우체부로 시작했지만, 앞으로 할머니 우체부가 되는 날까지 온기 우편함과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온기 우편함은 2017년 첫 설치를 시작으로 전국 73곳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29일 기준 700여명의 온기 우체부가 3만여통의 손 편지로 위로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