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1년 쿠바에서] 61만㎞ 달린 현대차 택시·정전 다반사…여전한 경제난
기사 작성일 : 2025-02-16 08:00:58

쿠바 택시기사 세르히오 씨의 현대차 계기판


(아바나= 이재림 특파원 = 15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에서 만난 택시기사 세르히오 씨의 현대차 주행거리 계기판에 '616581'(61만6천581㎞)라는 숫자가 보인다. 2025.2.16

(아바나= 이재림 특파원 = 미국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공식적으론 '미국 것'을 거의 쓰지 않는 쿠바에는 미국계 다국적 운송 서비스인 우버를 대체하는 '라 나베'(La Nave)라는 이름의 애플리케이션(앱)이 있다.

평생을 아바나에서 살고 있는 세르히오(50) 씨는 지난해 이 앱에 택시 기사로 자신을 등록했다.

"가족들을 위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몰고 있는 차량은 2006년식 소형 현대차다.

"아주 잘 나가고 부품 구하기도 비교적 쉽다"며 차 자랑을 하던 세르히오 씨에게 '몇 킬로미터 정도 운행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멋쩍은 듯한 미소와 함께 핸들 뒤쪽 주행거리 계기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616581'(61만6천581㎞)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지난해 한국과 쿠바가 수교했다는 사실을 비롯해 국제 정세에 대해 훤하게 꿰고 있던 세르히오 씨는 자신의 원래 직업을 '검사 출신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검사, 판사, 변호사 월급을 정확히 말해 줄 수는 없지만, 가족을 부양하며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에 매우 빠듯한 수준"이라며 "택시 운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아바나 주유소 앞에 늘어선 차량들


[촬영 이재림 특파원]

세르히오 씨의 '투잡'은 경제난 속에 낮은 급료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쿠바 보통의 삶'을 웅변하고 있다.

쿠바 정부는 금융 거래를 복잡하게 만든 미국 정부의 제재가 자국 내 경제 위기를 심화했다고 보고 있다.

국제 기축통화인 달러를 현지에서 직접 송금 받지 못하게 해, 기업들의 경제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게 쿠바 정부의 항변이다.

쿠바 주민 실생활에서 달러는 이미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지만, "미국과 쿠바 양국 정부 간 복잡하고 불편한 관계는 법인 입장에선 개선돼야 하는 상황"이라고 세르히오 씨는 강조했다.


쿠바 주유소 주변 풍경. 오른쪽 차량(앞 흰색 제외)들은 주유를 위해 대기 중이다.


[촬영 이재림 특파원]

한국과 쿠바 수교 1주년을 맞아 찾은 아바나 도심에서는 쿠바의 경제난, 특히 연료 부족에 따른 일상생활의 단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산한 도롯가 주유소 주변 골목에는 영락없이 수많은 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분명히 전날 오후에 봤던 승용차 몇 대도 여전히 그곳에 정차한 채 주유 순서를 기다렸다.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계획경제 정책에 근거해 차 한 대에 배정된 가솔린양은 최대 40ℓ라고 주유소 직원 로날드(45) 씨는 전했다.

옆에서 그 말을 듣던 한 주민은 "그 정도라도 제발!"이라고 소리치며 손바닥을 하늘로 향했다.


대낮 정전된 건물 안에 서 있는 소녀


[촬영 이재림 특파원]

쿠바 주민의 일상에 불편함을 주는 '악당'은 하나 더 있다.

툭하면 이어지는 정전이 그것이다.

쿠바 주민들이 성탄절보다 더 중요한 기념일로 여긴다는 밸런타인데이(2월 14일)에도 아바나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는 전력 공급이 순탄치 않았다.

이 때문에 쿠바 정부는 학교에 긴급 휴교령을 내렸고, 비필수 시설에서의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기도 했다.

문윤미 쿠바 영사협력원은 "쿠바 전력청에서 거의 매일 지역별, 시간대별로 조절해 순환 정전을 하고 있다"며 "전기를 많이 쓰게 되는 한여름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걱정된다"고 말했다.


쿠바 도로 현대차와 올드카


[촬영 이재림 특파원]

현재 쿠바는 전력 공급원으로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화력 발전소의 시설 노후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열악한 인프라에도 인력과 자본을 투입하며 문제 해결에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석유 부족 등으로 이렇다 할 전환점을 찾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9월엔 허리케인 '이언' 영향으로 전국이 한동안 암흑천지가 된 바 있는데, 당시 부서졌던 전력망은 여전히 복구되지 못했다고 한다.

쿠바에서 '미피메스'(mipymes·Micro, Pequenas y medianas empresas)라고 부르는 민간 중소 규모 기업 설립을 2021년 9월부터 승인해 주면서 전력 사용량이 지속해서 늘어난 것도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는 쿠바 정부에서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으로, 연초에 당국은 아바나를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긴 소매상점 등에 대해 규제책을 마련해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정전된 와중에 희비극의 한 장면 같은 모습도 목격했다.

미국 전기차 테슬라 한 대가 불 꺼진 도심 신호등 아래 도로를 내달리고 있었는데, '쿠바에 전기차 충전 시설이 있느냐'고 여러 사람에게 물었지만, 누구도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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