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뉴] 40대에 세상 바꾼 박정희·YS·DJ…이준석은?
기사 작성일 : 2025-02-04 07:00:01

만 40세 앞두고 대권 도전 채비 나선 이준석


이정훈 기자 =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 2일 서울 홍대 앞 거리에서 정치 현안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5.2.2

김재현 선임기자 = 40대가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이 된 사례는 박정희가 처음이었다. 1963년 10월 제5대 대선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선 박정희는 민정당 후보 윤보선을 불과 1.5%포인트 차로 제치고 대권을 거머쥐었다. 전라남도에서 57% 대 35%로 윤보선에 압승을 거둔 게 결정적 승인이었는데, 그때 박정희의 나이가 만 45세였다. 박정희는 4년 뒤 1967년 대선에서 신민당 간판의 윤보선과 재대결했고, 결과는 10%포인트 차 낙승이었다. 단기간에 사회 구악을 일소하고 비약적 경제성장의 초석을 닦은 공로가 연임에 큰 힘이 됐다.

▶ 박정희가 세운 유일한 40대 당선 기록은 1971년 대선에 신민당 후보로 나선 김대중(DJ)에 의해 깨질 뻔했다. 당시 만 47세였던 김대중은 김영삼(YS)이 일으킨 '40대 기수' 바람에 올라타며 3선 도전에 나선 박정희에게 맞섰다. 김대중이 결국 8%포인트 차로 패하긴 했지만, 공화당이 막판 영남의 지역감정을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승부를 뒤집을 수도 있던 선거였다. 김대중의 선전은 박정희의 장기 집권에 대한 경계심과 고도성장 시기 호남의 소외감이 동인이었지만, 파격적 공약으로 젊은 표심을 흔든 것도 적잖이 주효했다. 남북대화 추진, 미국·일본·중공·소련이 참여하는 6자 대화, 노동권 보장 및 노사정위 설치가 김대중의 핵심 공약이었다.

▶ 김영삼도 시대를 앞서간 젊은 정치인이었다. 1969년 당시 41세로, 4선의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은 전격적으로 차기 대선 출마를 선언해 야권에 거센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켰다. 윤보선처럼 내부 밀실 협상을 통해 대선후보가 되려 했던 60대 유진오, 유진산 등 일제강점기 구(舊) 세대들은 결국 출마 뜻을 접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줬다. 김영삼은 대선후보 경선에서 후발주자인 김대중에게 역전패당해 다잡은 승리를 놓쳤지만,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김대중을 힘껏 도왔다. 경선 패배 직후 "김대중의 승리는 나의 승리"라며 당내 단합을 외친 김영삼의 백의종군은 우리 정당사에 소중한 이정표로 새겨져 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선거벽보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 김대중 후보 선거벽보. [국가기록원 제공]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 차기 대권 도전을 사실상 선언했다. 이 의원은 1985년생으로 다음 달 31일 헌법상 대선 출마 가능 연령인 만 40세가 된다. 이에 맞춰 자신의 정치 역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된다는데, 재판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당해 쫓겨나는 걸 전제로 한 행보여서 조급하다는 인상을 준다. 이 의원이 나이 말고 딱히 내세울 게 있느냐는 시선도 문제지만, 저러다 결국 친정인 국민의힘과의 후보단일화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그의 선결과제로 등장한 모양새다.

이 의원은 20·30 남성의 역차별 심리와 합리적 중도층의 지지에 힘입어 30대 중반 나이에 야당 당수에 올랐지만, 1960년대 세상을 바꿔놓은 40대 기수들에 필적할 만한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노회한 선배 정치인들에게 속아 일을 그르친 것이라 하나 어찌됐든 모든 과오는 정치인인 자신의 판단과 처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해선 안 된다.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누구든 능력을 증명하려면 말보다 행동이 필요하다. 이 의원은 우선 구세대의 정치공학과 어떻게 결별할 것인지에 대한 답부터 내놓기 바란다. 구체적 비전을 보이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만 길이 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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